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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가 나아갈 길   2013-02-17 (일) 03:04
볍령자   2,228

옥천사가 나아갈 길 


☸ 경남 고성군민의 옥천사 사랑

  경남 고성군민들은 옥천사를 끔직이도 사랑한다. 옥천사를 고향땅 에서 가장 큰 절, 고향의 프라이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어릴 때 4월 초파일날 어머님 손을 잡고 옥천사에 참배하러 갔다든지, 초등학교 시절 여러 번 소풍을 다녀온 추억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 그리 하는 것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이런 개개인의 마음이 하나 둘 뭉쳐 고성군민의 공통적인 향수, ‘옥천사 사랑’으로 정착된 듯하다.

  일제강점기시 편찬된 <옥천음영(玉泉吟詠)>이란 소책자가 전해온다. 고성 고을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선비들이 옥천사에 관하여 각각 시 한 수씩 읊은 것을 모은 한시 60여수를 활판으로 영인한 책이다. 고을의 지식인들이 이런 한시집을 남길 정도라면 그들의 권속, 고성군민들이 그 얼마나 옥천사를 사랑하고 떠받들었는지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지금 70대, 60대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옥천사는 단순히 내 고향에 있는 큰 절이 아니라 내가 그 절에 의지하여 태어났고 조상대대로 그 절에 의지하여 삶을 이어온 마음의 안식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향 땅 고성을 떠나 서울이나 부산에 사는 고성 출신 출향인사들은 설이나 추석명절에 고향에 오면 꿈에도 잊지 못할 옥천사를 반드시 한 바퀴 둘아보고 간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옛날, 농지개혁이 있기 전에 주민들은 옥천사 절 논을 대대로 붙여먹고 살았고 옥천사 산판에 밭을 일구어 채소라도 심어먹고 살았던 연고가 있기 때문이다.

 

☸ 옥천사 산판관리

  옥천사는 1947년 농지개혁이 되기 전까지 매년 가을에 800석의 벼를 추수하였고 산판은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대가면 등 4개면에 565ha(169만평)이 있었다. 지금 논은 농지개혁으로 인해 모두 소작인 차지가 되었지만 산판은 아직도 옥천사 사찰림으로 등기돼 있다. 이 산판에는 옛날 산직이가 6명 내외 있어서 벌목을 금지하고 개간한 논밭이 있으면 3년 째부터 절 소유로 귀속시킨 후 5:5의 비율로 도지를 받았다.

  이 풍속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영오면 등 4개면 주민들은 아직도 사찰림에 밭을 일구어 채소 등 농작물을 가꾸어 먹고 있다. 그러나 땅주인 옥천사는 인건비 관계로 산직이를 고용하지 못해 어느 골짝에 누가 몇 평을 경작하고 있는지 현황 파악조차 하지 못 하고 있다.

  단지, 면사무소에서 매년 농지세를 부과할 때 현장 실사를 하므로 주민들이 논밭을 일구어 놓은 땅에 대하여 농지세를 부과하게 마련이다. 이 때 농사는 주민들이 짓지만 땅 소유주가 옥천사이므로 옥천사 앞으로 세금이 나온다.

  옥천사는 지금까지, “종교단체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세법조항을 들어 고성군의 고지서를 받고 납부 독촉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지 않고 용케 버티어 왔지만 이번에 ‘종교단체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됨에 따라 형편이 어렵게 됐다. 도지 한 푼 받지 못하면서 세금은 몽땅 옥천사 앞으로 나오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경작 주민들은 사찰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자기 농사짓는 땅에 대하여는 자진하여 세금을 바쳐주기 바란다. 그리고 옥천사는 4개면 사무소와 업무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즉, 면사무소 직원이 매년 토지 실사를 하면서 불법 경작주민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도록 권한을 위임, 세금 전환 조치하는 일이다. 4개면 사무소와 합의만 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옥천사는 임야가 점점 중요해져 가는 경향이있으므로 565ha(169만평)의 임야를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회사를 설립, 그들이 조림, 농지관리, 공장건립 등으로 사찰림을 경영하여 수익을 남기고 사찰에 매년 도지를 바치게 하는 ‘산지경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지금 옥천사 사찰림 565ha(169만평) 안에서는 허다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다. 옥천사 고개 넘어에 있는 산판에는 수십 년째 지방 유력가가 불법 목장을 경영하고 있고, 절 밑의 마을 사람 3인은 수십년 째 사찰림에다 불법으로 밤나무단지를 조성하여 매년 수익을 올리면서도 사찰에는 밤 한 톨 가져오지 않는다. 배 째라는 식이다.

  여기에 덩달아 관에서는 옥천사 앞으로 도로를 내어 일부 포장함으로서 면과 면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내는가 하면 산속에는 제멋대로 장뇌삼을 심어 영리를 꾀하는 무리들도 있다. 

  이렇게 절에다 손해를 끼치는 자들은 3대 이내에 집안이 폭삭 망하고 죽어서는 악도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관련 자들은 이 점을 알고 지난 잘못을 참회하고 사찰에 정당한 도지세를 납부하기를 당부 드린다.



☸ 부찰이던 옥천사

  옥천사는 1947년 농지개혁이 되기 전까지 매년 가을에 800석의 벼를 추수했던 부찰(富刹)이다. 이것은 그저 생긴 것이 아니라 옥천사 스님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고 도지수 들어온 것을 장리 내어 다시 논을 불려나간 데다가 옛날 주민들이 산판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면 3년 후 부터는 5:5로 도지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 된 것이다.

  1808년 조성된 옥천사 괘불의 발문에 따르면, “옥천사는 극락전 등 12개 요사채에 12개 물레방아가 있으며 대중 300명이 상주 하는 부찰이다. 교남(矯南,경남)에 절이 많지마는 실로 옥천사만한 절이 없다.”라 하고 있다. 즉, 해인사, 통도사보다 대중이 더 많고, 절 재산도 더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를 염려하여 경주 기림사, 여수 흥국사, 고성 옥천사 등 남쪽 바닷가 사찰에 군막사찰(軍幕寺刹)을 설치 하였다. 이 때 옥천사의 승군 정원을 보면, 영조 19년(1743) 340명, 영조 31년(1755) 300명, 헌종 8년(1842) 170명, 고종4년(1867) 137명 등이다. 승군 숫자가 이 정도라면 조선 후기부터 옥천사가 대찰로서의 사세를 계속 유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몰랐는데 여러 법당의 지붕을 고치다가 옛 상량문이 출현하여 알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렇게 절이 융성하다보니 묘욱대사, 시축대사, 용성대사, 농성화상, 수룡대사 등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이 대대로 옥천사에 주석하면서 재산을 관리하고, 절을 수축하며, 학인들을 공부시키고 대중을 통솔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옥천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일제강점기시대에는 무려 15인의 옥천사 승려들을 일본의 대학에 사비(寺費)로 유학시켰는데 이들은 동경고등사범, 구택대, 일본대, 동양대, 용곡대 등을 졸업하고 돌아와 옥천사를 위해 크게 보사(補寺)활동을 하였는가 하면 더러는 대학교수, 포교사로 나간 사람도 있다.

  옥천사 출신으로 유명한 스님들을 몇 분 들어보면, 고성이 고향이고 옥천사가 출가본사인 백초월(白初月)스님은 유명한 강사로서 백용성스님과 함께 손을 잡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다가 대전형무소에서 입적하신 독립운동가 이시다.

  또, 채서응(蔡瑞應)스님은 고성이 고향이고 옥천사가 출가본산으로 대원사, 벽송사, 천은사 등에서 경을 배워 일제강점기시 우리나라 5대 강사중의 한분으로 추앙받던 스님이다.

  스님은 중앙불전 교장(동국대 전신)이던 박한영 스님과 절친하여 매년 여름 방학이 되면 한영스님이 옥천사에 내려와 함께 지내다가 올라가곤 하였다. 서응스님은 옥천사 주지를 여러차례 역임하셨고 광복 후 옥천사에 주석하며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좌탈입망하셨다.

  또, 청담스님 같은 분은 옥천사 모 스님에게 출가했으나 은사스님이 퇴속하는 바람에 박한영스님을 새로 은사로 정하여 한영스님 밑에서 대교를 공부하고 전국을 운수하며 참선 수행하신 분으로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불출세의 고승으로 전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또, 사비생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박문성 스님은 광복 후 옥천사 초대 주지를 맡았으며 나중에 100세까지 사시면서 조계종 감찰원장을 30년이나 역임하신 큰스님이시다.

  이렇게 옥천사는 조선 후기이래 사세가 융성하였고 유명한 고승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된 유명한 사찰이다.

 

☸ 옥천사의 향후 과제

  그러면 오늘의 옥천사 현황은 어떠한가?

  광복 후, 절 논은 농지개혁으로 모두 빼앗기고 식량도 대지 못하여 빈찰이란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츰 사세가 확장되고 있다. 쌍계사 수석말사로서 아직도 법당이 10개나 되고, 성보박물관에 400점의 성보문화재가 보존되고 있으며, 사찰에 전해오는 기문(記文)이 92점이나 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현재, 청담스님의 손상좌 4-5분이 상주하시는데 그 중 수장이신 운봉봉래(雲峰鳳來)스님은 강원과 대학을 나온 스님으로 아직도 옛날 스님들의 계행과 고풍을 철저히 지키는 빈틈없는 율사로서 우리가 존경하고 받들어야할 고승이시다.

  전 주지 성륜(性輪)스님은 강원을 졸업한 화엄경의 대가로 여러 말사의 주지와 쌍계사 총무를 지내시고 옥천사 주지 4년 임기를 마친 무불통지의 고승이시다.

  또, 지금 주지로 계신 진성(眞性)스님은 법주사 선방에서 입승을 본 이름난 선객이시다. 주지스님은 “나는 옥천사 주지이면서 총무이고, 이 절 머슴이다.”라고 항상 겸양 말씀을 하시는데 주지 취임 후 많은 불사를 추진하여 여러 법당을 보수하고 새 건물을 짓는 등 옥천사를 일신해 놓았다.

  오늘날 옥천사는 대전 ⇔ 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전국의 많은 불자들이 찾는 이름난 사찰이 되었다. 논도 15여 두락 있어서 스님들의 식량은 넉넉하다.

  다만, 연화산 일대는 관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만 해놓고 개발이라고는 손톱끝 만치도 안하고 있다. 절로 들어오는 진입로 1.5km조차 확장 포장하지 않아 승용차가 교행조차 하지 못한다.  전국에서 이렇게 지정만 해놓고 무관심한 도립공원은 처음본다. 옥천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진입로를 확장 포장해줄 것을 건의 해야 한다.

  사찰은 절이 크고, 스님이 많이 모여 살고, 역사가 깊다고 해서 이름난 절이 아니다. 오욕락을 즐기는 속인과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즉, “공부하는 절”이라야 비로소 진정한 절이라 할 수 있다. 스님들이 공부하는 절로 만드는 것 - 그것이 옥천사의 최대 관건이다.

  옥천사가 있는 연화산은 다섯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반개半開하였다하여 연화산이라 부르고 옥천사는 그 연꽃 꽃심에 옥샘이 솟아난다고 하여 옥천사라 부른다.

  명산 길지에 자리잡은 옥천사인 만큼 이제부터 옥천사는 그 명성에 걸맞게 공부하는 절이 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옥천사가 옛 전통을 보전하고 앞날에 절을 보전시켜 나갈 방책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절이라 함은 강원을 개설하고 선방을 차리는 것을 말한다. 강원을 개설하려면 10인 이상의 학인을 모집해야 하고 유명한 강사스님을 초빙해야 한다. 기존에 강원을 운영하는 큰 절에서도 학인을 모으지 못 해 애로를 겪고 있는 판국인데 언감생심 강원을 개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강원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선방을 개설하면 어떨까?

  선방은 어렵지 않다. 선객 10여명만 모이면 선원 간판을 내걸 수 있다. 마침 옥천사에서 200m 떨어진 백운암은 광복후 한 때 선방으로 유명한 암자이다.

  해질녘에 백련암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삼각형 산이 바라보이는데 이 산이 망선봉(望仙峰)으로서 소위 선인(仙人)이 비파를 타고 옥녀가 피리를 부는 형세를 취하고 있으므로 이 암자를 길지로 꼽는다.

  일제강점기시대에 4대 옥천사 주지를 역임한 전덕운(全德雲)스님이 이 암자에 선방을 개설한 이래 남방의 유명한 선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광복 직후부터 6.25를 지나 1965년까지 선방을 운영하였는데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설석우(石友)스님, 대구 불교를 중흥시킨 보문(普門)스님, 제방선원의 조실을 지내신 인곡(麟谷)스님, 종정을 지내신 혜암스님, 직지사 조실로 계시던 관응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이 백련암 선원에서 수행하신 바 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지금 선원은 운영되지 않고 있다.

  이 선원은 조용하고 아늑하여 이 곳에서 공부해 본 선지식들마다 "기이하다. 몇 철을 살아도 물리지 않는 곳이다"하고 감탄한다. 이 곳에 선방을 개설하면 옥천사를 보전하고 종단을 이끌어 나갈 선지식을 다수 배출할 것임에 틀림없다.

  옥천사는 백련암에 선방을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선방을 새로 짓고 암자 주변을 정비해야 한다. 선원 차리는데 큰 돈 들어가지 않는다. 양식 올려보내고 수좌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런 선방을 운영하는 것, 그것이 현재 옥천사가 당면하고 있는 과업이다.

  일제강점기시 중앙불전 교장을 지내신 석전 박한영 스님은 당시  전국 5대 강사 중의 한 분이요, 절친한 도반이었던 옥천사 채서응(蔡瑞應)스님의 요청으로 경남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 입구에 있는 ‘홍예교(虹霓橋,무지개다리) 준공식에 즈음하여 기적비문(紀蹟碑文)’을 찬했다.

  한영스님은 이 비문 끝에 쓰기를,

  ‘이 홍예교를 건너는 자는 모두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이 다리를 건너는 분들이 약간만 노력하면 불도를 이룰 수 있을 텐데 그 약간을 채우지 못 해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한없이 안타깝다. 오늘도 새로 놓은 홍예교 밑으로 흐르는 저 시냇물은 모퉁이를 돌고 돌팍에 부딪칠 때마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불도를 이루었을 텐데.....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불도를 이루었을 텐데....“하고 재잘거리며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라 적고 있다.

  기발한 표현이다. 또, 사실이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마음, 이 지식, 이 신심에 약간만 더 보태면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을 텐데 그 약간을 채우지 못 해 이 인생을 무위로 마감하고 있는 이 사실, 안타깝다. 그러므로 소견 있는 자는 석전스님의 ‘조금만 더.....’라는 이 말을 명심하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조금만 더 노력하여 불도를 성취하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

  오탁말세는 점점 더 험악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고, 세월은 화살같이 빨리 지나간다. 무상은 신속하여 시절을 기다리기 어렵다. 진성스님 같은 선객이 주지를 하실 때 선방을 차리는 것이 좋다. 백운암에 사는 스님은 암주로서 그대로 절 주지 자리를 유지하고 계시고 큰절에서 재정을 부담하면 된다.  때가 왔을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엉뚱한 일이 생겨 죽도 밥도 되지 않는 법이다. 이 곳에 선방을 차리면 옥천사가  크게 번창하고 옛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끝.
 
원명 13-02-2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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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완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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