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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정신, 고성의 호국불교 I.] 옥처럼 맑은 샘물과 귀한 정신이 샘솟는 절집, 옥천사   2020-05-26 (화) 10:16
종무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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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정신, 고성의 호국불교 I.]
옥처럼 맑은 샘물과 귀한 정신이 샘솟는 절집, 옥천사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어 꽃을 피워올리는 연꽃을 닮아 연화산이다. 개천면과 영현면, 대가면에 걸쳐 있다. 해발 524m에 험로도 없으니 숲냄새 물소리 느끼며 쉬엄쉬엄 걷기에 좋다.
연화산은 조선 중기에만 해도 연화산은 선유봉과 옥녀봉, 탄금봉으로 불러싸여 마치 선인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이라 해서 비슬산으로 불렸다.
조선 인조 재위 당시 학명대사가 ‘옛 기록에 이르기를 산세가 돌올(突兀·높이선 모습)하고 쟁영(崢嶸·높고 험한 모습)하여 몇 송이의 부용(연꽃)이 남쪽별 곁에 빼어났으니 이것이 연화요, 그 중 옥파가 있어 돌구멍에서 솟아나고…’라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때부터 연화산이라 불렸다.
연꽃을 닮은 산 북쪽 기슭에 절집이 있다. 연꽃의 암술쯤 되는 자리, 돌 사이로 옥처럼 맑고 귀한 물이 솟는 옥샘이 있어 이름도 옥천사다. 땅에도 연이 있어야 머물 수 있다. 연꽃잎 사이에 있는 절집이니, 부처님 마음 한 가운데 있다 해도 되겠다.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니 1천300년을 훌쩍 넘긴 고찰이다. 구한말까지 한 번에 200명에 이르는 스님들이 주석하던 대찰이기도 하다. 한때는 기거하는 스님이 300명이 넘었고, 속해있는 암자도 12개나 됐다. 승병의 근거지였고,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이자 거점이기도 했다.

# 연꽃 닮은 산속에 숨은 절집, 옥천사
옥샘이 마르지 않는 절집은 산 아래에서 올라가든 산위에서 내려가든 꽤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노송과 때죽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소리,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조잘대는 새소리, 쉬지도 마르지도 않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조붓한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시름이나 무게 같은 건 슬며시 사라진다. 편편한 바윗등에는 어김 없이 돌탑들이 서있다. 누군가 납작한 돌 하나를 올려두면 오가는 이들이 한둘씩 더한다. 틈을 메운 것도 아닌데, 건드리지 않으면 돌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나그네들의 마음이 단단한 탓인가. 산길을 걷자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시끄러운 일상이 거짓말 같은 마음까지 든다.
일주문을 지나서도 제법 한참 올라가야 한다. 동서남북 사천왕의 시선을 거쳐 절집으로 들어서면 하마비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벼슬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마비 앞을 지날 적에는 말에서 내려 존경과 예를 갖춰야 했다. 하마비를 지나면 조그마한 돌다리를 만난다. 흐르는 물에 속세의 찌든 마음을 씻어내야만 절집에 들어설 수 있다. 나뭇잎 사이로 북슬한 털과 보라색 혀를 가진 차우차우 종의 개, 지혜와 명덕이가 슬그머니 나타난다. 옥천사에 도착했다는 신호다.
옥천사의 수많은 건물 중 가장 웅장한 자방루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공사 중이라 그 멋을 느낄 수가 없다.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다. 이후 효종 8년인 1657년 용성화상이 중창한 후 수 차례 중수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다.
대웅전 뒤 작은 누각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는다.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맑고 맛있는 물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옥천샘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아주아주 오래 전에는 샘물 말고도 공양미까지 솟았다고 한다. 한 스님이 더 많은 공양미를 얻으려는 욕심에 바위를 깨뜨렸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바위 아래에서는 더 이상 샘도 공양미도 나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또다른 스님이 옥천샘이 솟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라버렸던 옥천샘에 다시 샘물이 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후로 옥천샘은 만병이 치유되는 신통방통한 약수가 됐다.
옥천각 옆으로는 온갖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사부대중의 공양을 받을 만큼의 공덕을 갖춘 부처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승인 색난스님이 제작한 나한상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8년 1월 말, 7구의 나한상이 권속상 2구와 함께 행방을 감췄다. 2014년 한 사립박물관장이 도난문화재 은닉으로 검거되면서 나한상 2구는 돌아왔다. 그러나 나머지 5구의 나한상은 30년이 가깝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다 지난 2016년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가 개최한 옥천사학술대회에서 김희경 한국고미술감정연구소장, 최선일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이 사라진 나한상에 대해 발제했다. 마침 1980년대 안귀숙 박사가 연구를 위해 전국 사찰을 다니며 찍어둔 불교미술작품 사진 중 일부가 공개됐다. 이 우연한 공개로 옥천사에서 사라진 나한상이 제주 본태박물관 전시회에 전시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소장자는 이 두 나한상을 무상기증하겠노라 했고, 그렇게 옥천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나한상이 이번에는 미국땅에서 발견됐다. 크리스티경매에 출품된 옥천사 나한상은 경매 직전 철회됐고, 무사히 연화산으로 되돌아왔다.
조사전에는 옥천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모셔져있다. 홀로 수행하는 부처님 제자를 모신 독성각이나 산신을 모신 산신각,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등이 자리잡고 있다.

# 의상대사 화엄전교십찰 중 하나, 선무 위해 창건
옥천사는 그 뿌리부터 이미 선무와 항거의 목적을 담고 있었다. 옥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의상대사가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을 창건하면서 같이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라 창건 시기는 부석사와 같은 676년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종남산 지엄화상으로부터 8년간 화엄경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화엄학을 펼치기 위한 사찰 10곳 즉 화엄전교십찰을 창건했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는 태백산의 부석사(浮石寺),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비슬산(연화산)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岳·지리산)의 화엄사(華嚴寺)까지 6개 사찰이 기록돼있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10개 사찰로 기록돼있지만 다소 차이는 있다.
화엄전교십찰 중 대부분은 옛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 가까이 들어서있다. 반 신라적 기질이 강했던 위치다. 소가야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진흥왕 23년(562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와 항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내용들로 추정해보자면 의상대사는 소가야의 백성들을 선무하기 위해 비슬산 중턱에 옥천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옥천사에 대한 기록은 신라 말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 말, 효공왕 2년(898년) 창원 봉림사를 창건한 진경국사가 옥천사에 들어와 낭림선사와 도반을 맺고 가람을 크게 수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승군의 훈련장이었던 옥천사 앞마당
승려는 부처님의 제자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고 수행한다. 큰소리를 내는 일도, 급하고 큰 몸놀림을 하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국난이 닥치면 스님들은 승군으로, 전장에 나섰다.
일주문과 하마비를 지나 작은 돌다리를 건너 돌계단 몇 개를 올라서면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430여년 전 이 마당은 승군의 훈련장이었다.
옥천사의 배치 구조는 독특하다. 대부분의 사찰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개방적으로 배치돼있는 반면 옥천사는 대웅전 앞에 자방루가 있다. ‘꽃향기가 점점 불어나 멀리 퍼져나가는 누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자방루는 1745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다. 자방루는 승장이 훈련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의 실내교육장으로 쓰였다.
자방루는 정면 일곱칸, 옆면 세 칸이다. 대웅전이 세 칸이니 앞마당에서 보면 대웅전은 물론이고 산신각이나 옥천각, 명부전 등의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통의 누각은 누마루 아래로 사람이 다닐 수 있어 누각을 통과해 대웅전에 이른다. 그러나 옥천사 자방루는 돌담 위에 올려져 있고, 밖에서 보면 누각이 아닌 평범한 가람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누각은 사방이 뚫려 어디서든 외부를 볼 수 있고, 아래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구조인데 자방루는 양 옆에 있는 문을 닫으면 절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폐쇄적인 것이 마치 성곽이나 요새와도 같은 구조다. 절집을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책이 아니었을까.
하늘에서 보면 옥천사는 연꽃잎처럼 배열돼있다. 건물들의 규모만 보면 본사인 하동 쌍계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하동 쌍계사도 723년 창간 당시에는 옥천사라는 이름을 쓰다가 886년에서야 지금 이름인 쌍계사가 됐다. 최치원의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보면 ‘이웃 절도 옥천이라 하는데 이름이 같아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 (정강왕이) 쌍계(雙溪)라는 제호를 내렸다’고 돼있다. 지금은 옥천사가 쌍계사의 말사가 됐지만.

# 의승군 활약에 왜구 보복으로 전소 아픔
고려시대 몽고군이 쳐들어왔다. 당시 승군이 동원됐다. 승군은 임진왜란 때도 맹활약을 펼쳤다. 호국승군의 공로가 인정되면서 승려도 벼슬을 가질 수 있게 됐고, 대우도 훨씬 좋아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됐다. 조정은 사찰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억압했다. 조선 팔도의 사찰들은 겨우 현상유지만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옥천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선조 25년(1592년), 왜구가 조선에 쳐들어왔다. 임진년에 일어난 왜구와의 전쟁,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국가의 존망이 위기였다. 참선하고 수행하던 승려들은 승병으로 일어났다. 옥천사는 바다와 가까웠고, 백성들을 위해 창건된 사찰이었다. 승병의 육성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옥천사의 승려들은 스스로 의승군을 조직해 왜군에 맞섰다. 절집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수행하고 기도하는 도량의 역할을 잠시 접어두고, 승군의 병영지가 됐다. 호국안민의 가람중에서는 첫손에 꼽혔다.
의승군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왜군은 옥천사에 불을 질러 보복했다. 옥천사는 정유재란(1597년) 당시 전각이 몽땅 불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람이 불길에 사라진 후 40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됐다.
인조 17년(1640년) 학명대사가 근방을 지나다가 인근 동리에 묵게 됐다. 그날 밤 꿈에 홀연히 나타난 신인은 학명대사를 웅장한 가람터로 이끌었다. 잠에서 깬 학명대사는 꿈속을 더듬어 산길을 올랐다.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가람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학명대사는 도반인 의오대사화 함께 참선하면서 동상당 초가집을 짓고, 연화산 옥천사라 제액했다.
이후 조선 후기 들어서 묘욱·시축·용운·농성·수룡대사 등이 옥천사에 주석하면서 중수하고 점차 사세가 커졌다. 영조19년에 이르러서는 승군 정원이 340명이나 될 정도로 대찰로서 명성을 되찾았다. 옥천사는 군편제로 이뤄져 동편장, 서편장이 있었다. 한때 절의 전답을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거둔 곡식이 1천 석이나 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면서 절의 위세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옥천사는 조선 태종 때부터 질 좋은 종이를 생산했다. 정조 말기, 왕실에서 임금이 보는 문서 등에 쓰던 어람지를 생산해 진상하는 사찰로 지정됐다. 그때의 옥천은 마실 물이 아니라 닥나무 껍질을 담가 불리고 씻던 작업장이었다.
스님들은 질 좋은 닥종이를 연간 2천 속이나 만들어내야 했다. 연간 5천 냥의 비변사 지원을 받았으니 중앙관리와 암행어사의 출입도 잦았다. 세도가와 토호의 압력도 커졌고, 노역은 고됐다. 승려들은 절을 떠나기 시작했다. 헌종 때에는 상주하는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 정도로 줄였고 종이 생산량도 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옥천사에는 10여 명의 승려만 남게 됐다. 철종 때에야 60여년 간의 닥종이 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세가 늘면서 구한말에는 상주승려가 100~200명에다 승방과 물방앗간이 12개씩 있었다.

# 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
1919년 이른 봄, 한반도는 끝날 것 같지 않은 겨울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종의 장례식 후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들불처럼 일기 시작했다. 옥천사는 유난히 산중에 숨어있다. 일주문을 지나서도 한참 산을 올라야 절집을 겨우 만날 수 있다. 산 아래에서는 절집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숨어들기 적당한 장소다. 수 차례의 왜란에서 호국만인의 사찰로 이름을 떨친 옥천사가 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옥천사 스님들도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연꽃잎 같은 산틈에 숨은 절집은 애국지사들의 은거지가 됐다.
곤명면 출신 이주현은 고성에서 처음 시도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15일 밤 이주현은 대가저수지 아래 철성의숙을 찾았다. 그는 박거수와 박진완에게 고성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독립선언서를 전했다.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피체된 이주현은 일본인 고관 암살사건에 가담한 의열단원이었다.
대한독립청년단원이었던 변상태는 경남 서부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구만면 국천사장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낙종 선생은 변상태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
변상태는 최기백, 성학년 등과 함께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했고, 1917년에는 비밀결사조직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이들을 일본 경찰이 두고보겠는가. 변상태와 이주현은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옥천사에 주석하고 있던 신화수(申華秀)·한봉진(韓奉眞) 스님은 두 명의 애국지사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애국지사들은 산중 숨은 절집에 숨어들기 시작했다. 지사들은 비밀스럽게 거사를 논의했다. 두 명의 스님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지사들을 도운 것이 일본경찰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혹독한 고초는 뻔했다.
그러나 신화수·한봉진 스님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망설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두 스님 외에도 옥천사에는 대중스님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스님들은 암암리에 독립만세운동을 도왔다.
신화수 스님과 한봉진 스님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3.1운동을 지켜본 스님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옥천사를 드나들던 동지들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두 스님은 1921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마음 먹었다.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각오였다.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으로 체포된 신화수 스님의 당시 모습
ⓒ 고성신문
 

 
 
 
한봉진 스님의 판결문
ⓒ 고성신문
 
 # 제2의 독립운동 계획한 신화수·한봉진 스님
1921년 5월 12일 일본 육군성은 ‘조선독립운동자 검거’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를 내각총리대신에게 보냈다. 2년 전의 독립운동과 비슷한 활동을 계획한 조선인들을 체포했다는 보고서였다. 문서에는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선우협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소식을 전하는 밀사도 자임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동아일보에는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2명이 경남경찰부에 모두 잡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고서와 기사에 등장하는 13명의 이름 중에는 옥천사의 승려 신화수 스님도 포함돼 있었다.
신화수 스님은 2차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면서 승복을 벗었다. 스님은 농사꾼으인 척했다. 그리고 영오면 오동리 서정윤 선생과 함께 본격적으로 준비에 나섰다.
그런데 그만 고향친구 이경렬이 일본 헌병의 앞잡이노릇을 했다. 스님들의 계획을 밀고하면서 신화수 스님은 경상남도경찰부와 진주경찰서 합동수사대에 피체되고 말았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 살인예비 혐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스님은 속랍 25세에 불과했다.
한봉진 스님은 국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봉진 스님은 1919년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임시정부의 명에 따라 국내에 들어온 윤영백 선생과 함께 활약했다. 거점은 옥천사였다.
남아있는 일제 판결문에는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옥천사 승려 한봉진이 1920년 임시정부가 국내에 파견한 고성군 출신 요원 윤영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인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고 기록돼있다. 판결 당시 한봉진 스님은 속랍 50세였다.

 
 
 
신화수 스님이 해방 후 의열단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앞줄 오른쪽 첫번째)
ⓒ 고성신문
 

# 신화수 스님, 독립자금 모금이 강도 혐의로 둔갑
신화수 스님은 1919년 4월 1일 동대문교회 안에 있던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김상옥 의사를 비롯해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전우진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인 혁신단(革新團)을 만들었다. 혁신단은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했다.

당시 혁신공보의 사장은 고성 영오면 출신이자 진관사 태극기를 그린 백초월 스님이었다. 혁신단은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항일전단을 제작해 배포했다. 그러나 자금난에 부딪혔다. 혁신공보의 발행이 난관을 겪자 혁신단은 방향을 틀어 암살단을 조직했다. ‘육혈포 암살단’이었다. 총책은 김상옥이었고 신화수 스님은 집총대장이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오르던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들이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님은 동지들과 거사를 모의했다. 암살취지서, 일본고관 경고문, 조선 관리 사퇴 권고문 등을 작성해 인쇄했다. 조선 관리 사퇴 권고문은 국천사장에서 출발한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 당시 최낙종 선생과 동지들이 지역 면사무소 등에 돌린 것과 같은 것이다.암살 명부도 만들었다. 미국 의원방문단이 경성에 도착하면 환영식이 열릴 참이었다. 사이토 마고토 조선총독을 포함한 일본 고관들이 모두 모일 이 환영식장이 거사 장소가 됐다.
3개월 전부터 준비가 시작됐다. 그러나 사전에 들통나버리는 바람에 무산돼버렸다. 거사를 주도했던 김상옥 의사는 쫓기다가 10월, 상해임시정부로 피했다. 1923년 김상옥 의사는 압록강 철교를 넘어 경성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일본총독 암살이 최종목표였지만 그에 앞서 수많은 독립지사들을 체포해 모진 고문을 했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신화수 스님은 이때 군자금 1천 원을 제공한 혐의로 피체되고 말았다. 1923년 3월,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일본경찰은 스님을 모질게 고문했다.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신화수 스님은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예비,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문서, 자금영수증, 인장에 사용할 비용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1923년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스님은 같은 해 10월 10일, 신화수 스님은 경성복심법원에서 강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경성복심법원 재판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 데 방조했다’는 내용의 공소 기각을 받고 풀려난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조선인들이 모은 자금을 일제는 강도라 낮췄다. 어쩌면 일제는 스님의 ‘죄’가 군자금, 독립자금 모금이라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알려지면 오히려 일제에 반감이 커질 거라 생각해 두려워한 것 아닐까.










“옥천사는 종교를 떠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 없어 안타까워
통도사 출신 불교계 독립운동가 옥천사 스님이었을 수도
근현대 사진전, 항일운동 거점으로서의 가치 높일 터





인터뷰 원명 스님 / 옥천사 성보박물관장


 
 
ⓒ 고성신문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성공적인 독립운동이었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옥천사 성보박물관 원명스님은 옥천사가 독립지사들의 기거처 역할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모의, 자금 모금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옥천사는 신화수·한봉진 스님과 같은 승려뿐 아니라 지역 내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군자금을 가져가기도 보내주기도 하는 독립운동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옥천사가 통도사의 말사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스님들 중 통도사 출신으로 알려진 몇몇 스님은 옥천사의 스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있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당시 의상대사가 창건한 후 승병의 주둔지에서 그치지 않고 승병을 양성해내는 훈련소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애국지사들의 주요 활동거점이었다. 경남서부보훈지청은 5월의 현충시설로 ‘옥천사-고성독립운동 근거지’를 선정했다.
옥천사는 최근 들어 역사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 3월에는 ‘고성 연화산 옥천사 사적기’를 펴냈다.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과 원명 스님이 편자로 나선 이 사적기는 1천500여 년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와 빼어난 풍광을 가진 옥천사의 자취를 담고 있다.
옥천사는 올해 하반기에 옥천사 근현대사를 되짚어보는 사진전을 기획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창건 이후 근현대 항일운동으로 이어지며 호국도량으로서 옥천사가 갖는 의미와 가치, 역할 등을 연구하고 계속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근현대사 안에는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역사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도 포함됩니다. 옥천사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될 거예요. 우리 지역 사찰이 호국의 거점이었다는 것, 군민들께도 알리고 그 가치와 자부심을 더하려 합니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황수경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0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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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 즐기는 스님의 저절로 다 되는 절 만들기. 경남 고성 옥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