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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적묵당 상량문 발견에 따른 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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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경일 작성일07-01-22 16:44 조회6,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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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적묵당 상량문 발견에 따른 해설문> 2007. 2월 현재 옥천사에서는 적묵당 전면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적묵당은 탐진당과 함께 대웅전 앞에 병열로 나란히 건립된 건물로 본래 스님들이 경을 읽고 대중공양을 하며 공동숙소로 사용하던 큰방이다. 이 적묵당을 공사중인 지난 1월 8일 대들보 안에서 상량문 3점과 불경1점이 발견되었다. 한지에 묵서로 내리 쓴 상량문은 적묵당을 처음 초창한 인조23년(1645)의 것이 1점, 2차 중건한 영조2년(1726)의 것이 1점, 3차 중건한 순조12년(1832)의 것이 1점 등 모두 3점이다. 불경은"불설명당신경(佛說明堂神經)"이라는 새로운 경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3점의 상량문이 발견된 것은 선인들이 매 중수시마다 종전 상량문을 함께 올렸기 때문에 출현 가능했다. 이들 상량문은 최고 360년에서 최하 170년의 오랜 고문서이지만 조금도 손상없이 원형을 잃지 않고 있다. 상량문은 적묵당의 정확한 건립연대를 밝혀주고 있고 당시의 많은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고 옥천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서라 할 것이다. 옥천사에서는 이번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조만간 보장각에 전시하여 신도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대신 대들보에는 이들 3개 상량문의 중요내용을 발췌 서사(書寫)한 상량문과 신규 작성한 상량문을 함께 올렸는데 이 일은 선교를 겸한 선지식이자 서예가이신 성륜(性輪)주지스님께서 직접 맡아 하셨다 한다. 인조23년(1645)의 적묵당 초창 상량문에는 "지사(持寺)학명(學明)"이란 인명이 나온다. 지사(持寺)란 오늘날의 주지를 말한다. 여기 학명스님은 정유재란 시 불탄 옥천사를 40년 만에 중창했다는 학명대사가 바로 그 스님이다. 학명스님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정유재란시 왜군들에 의해 옥천사가 불타고 절터는 40여 년 동안 잡초만 우거진 채 폐허로 내려오다가 인조 17년(1640) 학명대사(學明)가 이 근방을 지나다가 인근 대둔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웅장한 가람터로 인도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학명대사가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보니 과연 꿈 속에서 보았던 대 가람 터인지라, 도반인 의오대사(義悟)와 함께 십여년 동안 참선하면서 동상당(東上堂) 초가집을 짓고 연화산 옥천사라 제액(題額)하였다고 옥천사 연혁에 전해온다. 적묵당 상량문이 인조23년(1645)에 만들어졌고 학명대사가 옥천사에 처음 오신 것이 인조 17년(1640)이니 불과 5년 차이다. 그만큼 이 상량문은 오래됐고 그 유명한 학명대사의 이름이 이 상량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초창 상량문에는 "별좌(別座) 시축(時竺)"이란 이름이 나온다. 시축대사는 병진년(1688년)에 옥천사 대웅전을 비롯한 가람 전부를 중수하신 큰스님으로서 당시 마을 사람들은 옥천사를 "축사(竺師)의 절"이라고까지 불렀다 한다. 적묵당 초창당시 시축대사는 아직 청년스님으로서 이 불사의 별좌 소임을 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초창 상량문은 아주 글씨가 머터럽고 고졸(古拙)하다. 상량문 끝에다 "백천겁이불고, 긍만세이현금(百千劫而不古, 亘萬世而現今)이라는 문구를 적었는데 한문 글 몇자가 틀릴 정도로 서툴게 써 놓았다. 이 문구는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33)대사가 "금강경오가해"를 발간하면서 그 서문에 쓴 유명한 문구로서 해인사 일주문에도 해강 김규진선생이 쓴 주련이 걸려있다. 그 뜻은 지나간 백 천 만 겁이 옛날이 아니요, 앞으로 닥아올 만세도 이제 일 따름이다"라는 뜻으로 각자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항상 여여한 현재일 뿐,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구는 흔히 선승들이 즐겨 쓰는 문구인데다 글씨조차 선승들이 즐겨 쓰는 고졸한 글씨이고 보니 이 상량문을 만들어 넣은 학명대사 등 시(時) 대중 10여인은 전적으로 선승들이었다고 생각 든다. 즉, 옥천사 사적기에 "인조 17년(1640) 학명대사(學明)가 도반인 의오대사(義悟)와 함께 십여년 동안 참선하면서.... "운운 하고 있는데 그를 뒷받침하는 상량문 실물이 나온 것이다. 만일 글 잘하는 학승이 단 한 분이라도 계셨더라면 이와 같이 고졸한 상량문은 넣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2차 중건한 영조2년(1726)의 상량문에는, "山川승기를 따라 위에 법당을 세운 후 아래는 仙閣을 세우되 오른 쪽은 강당이요, 왼쪽은 선실로서 적묵당은 그로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기러기 앉듯 절 건물이 자리잡아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니 범종소리 교향(交響)하여 은은히 울려퍼지고....“란 구절이 보인다. 또, 뒷부분에 “영차! 들보를 西에 던지니 弱水는..., 영차! 들보를 南에 던지니 河魄은..., 영차! 들보를 上에 던지니 妖星은..., 영차! 들보를 下에 던지니 龍宮은...” 하고 적고 있다. 이런 상량문 끝에 시(時) 대중 명단을 적었는데 무려 8개의 승사(僧舍,요사채)에 250명의 스님을 나열하고 있다. 각 승사에는 한주스님과 방장(房長)을 서두에 적고 맨 끝에는 심부름 하는 동자승 1명을 적는 등 숭사별로 25명 내외의 명단을 적고 있다. 250명의 스님 명단을 적고 있는 이 점이 옥천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가장 큰 가치라 할 것이다. 부연하면, 순조13년(1808년)에 옥천사 방장 구연(九淵)대사가 찬한 <옥천사 괘불조성기>에 "경상우도(경남) 70고을 중 진양(진주) 만큼 큰 고을이 없고 환주(還珠;경남) 수 백 사찰 가운데 옥천사만한 절이 없다”하면서 옥천사의 8개 방사인 청계당, 백련당, 관음전, 청련암, 백련암, 탐진당, 설선당, 백련당에 기거하는 250명의 승려 명단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그보다 82년이 빠른 이번 상량문 영조2년(1726)의 것에서도 방사명과 대중수가 비슷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10여년 전, 금당을 수리하면서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19년(1743) 옥천사의 승군 정원은 340명, 영조 31년(1755년) 300명, 헌종8년(1842)170명, 고종4년(1867) 137명의 군정(軍丁)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 약 200년간의 옥천사 대중수는 평균 150명-300명으로서 해인사나 통도사를 능가하는 영남 제1의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2년(1726) 상량문에 나오는 청계당(淸溪堂)은 지금 옥천사 우측 언덕, 텃밭이 있는 자리에 있던 장방형(長方形) 긴 건물이었다. 그리고 극락전은 지금 축성전 자리에 있던 아담한 암자를 말한다. 이들 건물들은 조선 말기까지도 건재하였는데 구한말에 중수되지 못 하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극락암 건물은 일제시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연화사를 짓는 재목으로 쓰기 위하여 철거되었다고 하니 안타깝다. 이것을 볼 때 오늘날 옥천사는 옛날 연화산 경내에 있던 8개의 요사채를 다 복원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만일 향후 재정이 넉넉해지면 청계당과 극락전 만이라도 복원하여 4부대중의 수행공간으로 공개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이러한 상량문 3건과 함께 영조2년(1726)에 작성한 불설명당신경(說明堂神經)이 출현하였다. 이 경은 당시의 고승인 송암스님이 적묵당의 택지가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서 도인이 많이 나오는 명당이 되라고 적어녛은 경이다. 주로 불설천지팔양신주경, 불설금강명경 등에서 좋은 문구를 따와 7언절귀의 게송 형식으로 적었다. 게송은 2구씩 대구(對句)로 4행을 적어 합 16수이다. 이 경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전 분류상 가타(風頌, 孤起頌)에 속하고 종래부터 전래된 경이 아니라 송암스님이 창작한 불요의경이다. "불설명당신경(佛說明堂神經)“이라 불설을 붙인 것은 원전의 천지팔양신주경 등이 불설이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류의 게송은 흔히 상량문 말미에 다는 것일 뿐 따로 경이라고 할 것 까지 없는데 발췌하여 따로 봉안하다보니 경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적묵당은 일견 마지막 상량문을 넣은 해인 순조12년(1832)을 끝으로 지금까지 중수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1946년에 또 한차례 중수가 있었다. 2005년 8월 적묵당과 연결된 요사채 수리공사를 할 때 대들보 목재 밑면에 "세재 병술(歲在 丙戌,1948년)"이라 쓴 묵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요사채를 수리하면서 연결된 적묵당도 함께 수리하였을 터인데 썩은 기둥을 2-3개 동가리하고 서까래 몇 개를 교환하는 소규모 보수였기에 상량문을 넣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사승들의 말에 의하면 광복 후 몇 차례 사소한 보수공사가 있었다고 한다.1970년대에 적묵당에 딸린 부엌을 확장시켜 기념품 가게와 출입문을 달아내었다. 이로 인하여 자방루와 기념품가게의 지붕이 맞닿는 바람에 비만 오면 낙숫물이 옆 벽면을 쳐서 기둥이 썩는 등 피해가 컸다. 그러던 것을 이번 공사시 기념품 가게와 부엌문을 철거하고 원래대로 간격을 벌여놓고 보니 그렇게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다. 절터는 국량(局倆)이 있는 법이다. 옛 어른들이 절을 지을 때는 국량에 맞게 건물을 앉혔던 것인데 오늘날 욕심 많은 중생들이 덮어놓고 큰 것, 넓은 것, 많은 것, 웅장한 것, 격식 있는 것만 선호하다보니 국량과 조화를 파괴하게 되어 오히려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그러한 단면을 이번 공사에서 실감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번 발견된 상량문은 옥천사 역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옥천사와 같은 고찰이 아니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귀중한 유물이다. 삼가 옥천사 아미타 3존 부처님께 계수예배 드립니다. 아울러 적묵당을 보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신 김태호 경상남도지사님 복혜무량 하소서. 2007. 2. 전 옥천사 사무장, 전 경상남도문화재담당 法鈴散人 장경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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