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 옥천사


신라 천년고찰 옥천사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공경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연화산 옥천사
옥천사 천년역사

연화산 옥천사

연화산 옥천사

옥천사(玉泉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쌍계사 진감(眞鑑)선사 대공탑비(大空塔, 887년 건립)에 쓰기를,『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으나 근처에 옥천사라는 절이 있어 한강왕이 쌍계사라 고쳐 제액(題)을 내렸다』고 하고있어 헌강왕 재위기간(875-885) 이전부터 이 곳 옥천사가 존재했음이 확실하다.

의상대사는 당나라 종남산 지엄화상으로부터 8년간 화엄경을 배워 돌아온 후 해동에 화엄학을 펴기 위해 <화엄전교십찰(華嚴傳敎十刹)을 창건하였는데, 그 때 건립된 사찰의 대부분이 반 신라적 기질이 농후한 옛 고구려, 백제의 수도 근교에 배치되어 있다. 이 곳 고성군에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인 옥천사가 창건된 것은 이 지역이 소가야 지역으로 금관가야가 멸망한 진흥왕 23년 (562)까지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항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 소가야지역 주민들을 선무하기 위하여 옥천사를 창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화산 옥천사

의상대사가 통섭만법 명일심(統攝萬法 明一心)의 화엄사상으로 우리민족의 사상을 통일하고자 한데 비추어 신라 조정은 통일된 3국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신라 조정에 복종케 하는 데 뜻이 있었다. 양자의 목적은 다르지만 사찰을 건립하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므로 의상대사는 신라조정의 도움을 받아 <화엄전교십찰>을 창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화엄전교 십찰>이 성립된 시기는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의상대사의 제자들에 의하여 완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옥천사의 창건연대를 부석사의 창건연대인 676년으로 보는 것은 그 전후에 옥천사가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옥천사 역사는 잘 남아 있지 않고 신라 말인 효공왕 2년(898)에 창원 봉림사를 창건한 진경국사 심희(眞鏡審希)가 이 절에 들어와, 먼저 주석하고 있던 낭림(郞林) 선사와 도반을 맺고 가람을 크게 수축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 의상대사 >


1950년 10월 19일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옥천사는 그 많은 전답을 고스란히 소작인들에게 넘겨주는 대 변혁이 일어났다.

당시 30리 이내의 불량답(佛糧畓)은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규정이 있어 다른 사찰에서는 일부 전답을 구제 받기도 하였으나 옥천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전답 한 평 건지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빈찰(貧刹)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절은 재정적으로 어렵게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3대 부자없고 3대 가난뱅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흥한자쇠하고 쇠한 자흥하는 것은 세속이나 사찰이나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부찰이던 절이 60년 동안 빈찰로 전락하여 고생했으니 이제 다시 부찰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통이 불편하던 옥천사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대전에서 2시간, 서울에서 4시간이면 올 수 있게 되었으니 경남의 오지에 숨겨져 있던 옥천사가 이제 빛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화산 옥천사
보장각(寶藏閣)
옥천사 유물전시관인 보장각(寶藏閣)에는 보물 제495 호 "임자명 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한 120여 점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산내에는 청련암, 백련암, 연대암, 적멸보궁의 4암자가 있으며 포교당으로는 고성읍에 보광사가 있다. 그밖에 옥천사 앞으로 등록된 비구니 암자로 하동군 횡천면에 낙서암이 있고 고성읍에 무등선원이 있다. 특히 백련암은 선방으로 유명했던 암자로 6.25를 전후하여 인곡스님, 설석우스님, 관응스님, 서옹스님, 월하스님, 혜암스님 같은 큰 스님들이 참선 정진하던 유서 깊은 선원이다.
옥천사는 불교정화운동의 기수였던 청담스님이 출가한 삭발본사로 유명하다. 옥천사에는 청담스님의 사리탑과 탄허스님이 직접 짓고 쓰신 탑비가 있다.
옥천사는 반개연화(半開蓮華)의 연화9봉이 감싸고 있어서 항상 안온한 기운이 감도는 명당 길지(明堂吉地)이다. 이 절에서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한 인사가 50명이 넘고 장관이 여러 명 나왔다. 이 절의 아미타삼존불께 기도하여 부자가 되거나 득남(得男)한 사례는 100례가 넘는다. 옥천사 일원은 경상남도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을 포함한 연화산 일원은 "경상남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1911년 일제가 <사찰령>을 공포하고 31본산을 정할 때 옥천사도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와 더불어 대본산으로 지정 되었지만 당시 주지 채서응(蔡瑞應)스님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석, 대본산 지정을 극구 사양함으로서 지정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옥천사 승려들은 대본산 지정이 안 된 것을 잘 된 일이라고 하며 칭찬이 자자했다한다. 그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과 같이 60년 동안 닥종이 부역에 혼이 난 옥천사 승려들이 관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부반응을 보였던데 원인이 있었다.
연화산 옥천사

옥천사는 조선 후기에 부찰(富刹)이었던 만큼 1920년 경 진주 옥봉에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포교당을 창건, 광복 전에는 "통도사포교당” , 광복 후에는 "연화사(蓮華寺)"라 불렀다. 그것은 옥천사의 배산이 연화산이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에는 개천면 예성리와 명성리 중간에 옥천중학교를 건립하였으나 인가를 받지 못해 무산 되었고 잇달아 옥천사 경내, 지금의 청담스님 사리탑이 있는 자리에 옥천중학교를 설립하여 일시 중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옥천사 스님들을 일본의 東洋大學, 龍谷大學, 東京高等師範등에 유학을 보내 15인이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들은 귀국하여 대개 주자를 맡거나 교육계로 진출하여 교장이나 포교사로 활약했다. 일제 강점기시 일본 경찰은 옥천사 스님들을 지식인들로 보고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는데 백초월스님 같은 분은 서울의 용성스님과 손잡고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다가 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옥천사는 지금 쌍계사의 수석 말사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통도사의 수석 말사였다. 그러나 옥천사 주지는 항상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선출하여 본사의 승인을 득하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통도사에서 주지를 뽑아 파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옥천사의 위상과 인물은 대단하였다.
1921년 세진교(洗塵橋 , 무지개다리) 비문을 쓴 대 강백 박한영 스님은 “오호! 교남(嶠南 : 경상도)에 그 옛날 웅장했던 崇福寺(경주),黃龍寺(경주), 嚴川寺(함양), 斷俗寺(산청단성)와 같은 대찰들이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외로운 찰주와 부서진 탑만이 무심한 뜬구름과 서산 낙조에 그림자 지고 있는 이 마당에 오직 옥천사만이 인간세상의 세월을 벗어난 듯 법등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에 석덕스님들과 주민들이 시주하여 公衆을 위하여 다리를 가설하였다하니 실로 천 년을 이어오는 유풍이 아닐 수 없으며 비석에 새겨 송덕해도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7세기에 창건된 옥천사가 1,300년이 지나도록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숭조선 후기에 옥천사는 부찰(富刹)이었다. 사찰답 800여 두락을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5:5의 비율로 도지(수)를 받으면 1,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산판은 560 정보로 산지기가 5-6명이나 되었다.


사찰답이 많은 이유는 농민들이 산판을 논으로 개간한 후 3년간 자영한 후 사찰답으로 귀속 받은 것이 많지만, 스님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도지 받은 추곡으로 계속 논을 불려나갔기 때문이다.
절이 부찰이었던 만큼 신중의 승려수는 300명~ 100명에 이르렀다. 현재도 법당이 9개나 되고 각종 유물이 400점 이상 남아 있으며, 각종 현판이나 기문이 92점이나 남아 있다. 기문이 이렇게 많이 남아 조선후기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사례는 드문 일이다.
1950년 10월 28일 단행된 농지개혁 때 800 두락의 사찰답은 소작인들의 손에 전부 넘어갔다. 하루 아침에 한 평 없는 빈찰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임야는 아직도 건재하다.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대가면 등 4개면에 565ha의 임야가 사찰림으로 등기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이룩된 주요 불사를 보면, 효종 5년(1654)에 대웅전을 건립했고, 숙종27년(1721)에 대종(大鐘)을, 영조 40 (1764)에 자방루를, 영조50년(1774)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순조4년(1808)에 괘불을, 고종원(1864)에 대웅전을 각각 조성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승려들을 국방에 이용할 목적으로 바닷가 사찰에 승군을 양성했는데,
① 영조 19년(1743) 옥천사의 승군 정원은 340명이었고(金堂重修上梁文 : 乾隆 8年 癸亥 軍丁 合340名),
② 영조 31년(1755년)에는 300명(玉泉寺之堂上樑文 東片將 通政雷逸 150名, 西片將 判事智英 軍丁150名),
③ 헌종8년(1842)에는 170명(東邊將 幸守, 西邊將 輔敬 軍丁 合 170名),
④ 고종4년(1867)까지도 137명의 군정(軍丁)이 있었다고 한다. ( 金堂移建上梁文, 東片將 必權 軍丁數 72, 西片將 萬一 軍丁數 65)
이와 같은 사실은 여러 전각을 수리하다 발견된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승군은 일명 항마군(降魔軍)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 때부터 승군이 동원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 한양전투, 금산전투를 비롯한 곳곳의 전투에서 맹활약을 벌였다. 이러한 호국승군의 공로가 인정되어 승려에게도 벼슬이 가자되고 대우가 달라졌다.
조정에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치른 경험을 살려 병자호란 이후부터 바닷가 사찰을 위주로 승군을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사찰을 속칭 군막사찰(軍幕寺刹)이라 불렀다.
현재 옥천사의 넓은 마당은 승군의 훈련장이었으며 자방루(慈芳樓)는 편장(片將)이 앉아 승군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을 교육시키던 장소였다. 승군은 2개 편대로 나누어 동편장(東片將)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당상관), 서편장은 판사(判事)가 맡았다. 이들은 모두 벼슬을 제수 받은 승려로서 주지의 산하에 있었으나 군사작전에 관한한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옥천사는 정조 말기(1800경)에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 : 관에서 쓰는 닥종이로 임금이 열람하였므로 어람지)로 지정되어 철종 14년(1863)까지 60여 년 동안 닥종이 제조부역에 시달렸다.
심한 노역에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자, 헌종 8년(1842)에는 상주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 여명으로 줄여주고 닥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지만 그 것 조차 감당하지 못해 고종 17년(1880)에는 불과 십여 명의 승려만 남았다한다.
철종 14년(1863) 당시 통제영의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있던 신관호(申觀浩)공이 옥천사를 방문하여 “연화옥천(蓮華玉泉)” 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이 때 농성 화상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면제시켜줄 것을 호소, 신공이 조정에 장계(狀啓)하여 닥종이 부역을 면제 받게 되었다.
옥천사는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벗어나자 이로부터 대중이 늘고 사세를 회복하게 되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구한말까지 상주 승려 100명~200명에 12승방과 12물방앗간이 있었다한다.
옥천사는 조선 후기에 오랫동안 진주목 관할에 있었던 까닭에 "진주의 대찰 옥천사" 라 일컬어졌다.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사주하여 불사를 일으킨 일이 많았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 삼도수군통제영, 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같은 관의 도움이 화근이 되어 철종13년(1862), 진주의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세공미 수탈에 반발하여 진주민란(우우통의 난)을 일으켰을 때 성난 농민들이 옥천사로 몰려와 절 외곽의 전각을 불태우고 대종을 파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고종25년(1888)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학군이 몰려와 절 외곽에 있는 많은 전각들을 불태웠다. 당시 다급해진 용운대사가 '이 절에는 주상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다.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너희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니라!' 하고 호통을 치자, 역적이란 말에 놀란 농민들이 방화를 중단함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웅전, 자방루, 적묵당, 탐진당 등 사찰 중심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한다.
이렇게 옥천사가 번번이 민란에 수난을 당한 까닭은 이 절이 관의 도움을 받는 부찰(富刹)이었기에 관아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 하고 만만한 옥천사를 공격함으로서 관에 대한 강한 항의 표시를 한데 원인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전각들이 대개 1890년대에 건립된 것은 동학란에 불탄 후 다시 중건했기 때문이다.
고종 27년(1890) 조정으로부터 "명산고찰에서는 왕실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 는 교지가 내려오자 당시 경상도관찰사 겸 진주목사로 있던 상국(相國) 박규희가 사재를 털어 축성전(祝聖殿)을 짓고 임금의 수복안녕을 기원했다. 이 때 고종으로부터 축성전(祝聖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현재 절에 보관 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현상유지만 하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사의 승려들이 의승군을 조직, 왜군에 대항하였다. 왜군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정유재란 (1597)시절 건물을 모조리 불태웠다.
절터는 40여 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채 폐허로 내려오다가 인조 17년(1640) 학명대사(學明)가 이 근방을 지나다가 인근 대둔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웅장한 가람터로 인도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사가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보니 과연 꿈속에서 보았던 대 가람 터인지라, 도반인 의오대사(義悟)와 함께 수년 동안 참선하면서 동상당(東上堂) 초가집을 짓고 연화산 옥천사라 제액(題額)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 묘욱(妙旭)대사, 사축대사, 용운(龍雲)대사, 농성대사, 수룡(水龍) 대사, 같은 고승들이 대대로 이 절에 주석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사세를 확장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에는 혼응(混應)대사, 혜거(惠居)국사, 혜은(慧隱)대사, 묘응(妙應)대사, 보융(普融) 대사, 지운(智雲)대사, 원오 (園悟) 대사 등 고승 대덕들이 대대로 이 절에 주석하면서 절을 수축하고 승풍을 진작시켰다.
혜거(惠居)국사는 고려 광종 15년(964) 옥천사에 와서 먼저 와 있던 혼응대사와 함께 도우를 맺고 절을 3창하였다.
묘응대사(1076-1142)는 천태종스님으로 고려 예종(1106-1121) 때 옥천사에 와서 천태학을 강의하였다.
보융대사는 고려 고종24년(1237) <대장도감 분사>를 진주(남해 고현)에 설치했을 때 일연대사와 손을 잡고 그 감역을 맡아 팔만대장경을 교정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웠다.

대한불교조계종 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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