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씨는 매우 단정하고 숙련된 명필 글씨이다. 낙관을 탁본하여 판독한 결과 조명채(曹命采 1700-1764)로 되어 있어 영조 때 이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조명채가 옥천사에 왔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조명채는 불교에 심취하여 해남 대둔사 환성당 지안(喚醒志安:1664-1729)대사의 비석을 다시 세울 때 비문을 쓰기도 했다. 본관은 창녕, 자는 주경(疇卿), 호는 낸재(蘭齋). 1762년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옥사와 관련하여 국문을 당하다가 곧 풀려났으나 2년 후에 죽었다. 영조는 그를 애석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봉작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