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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고찰 옥천사

모든 중생을 부처님으로 공경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연화산 옥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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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 유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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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무소 작성일26-09-28 16:00 조회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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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泉寺 有功錄 - 1791(正祖 25, 乾隆 56)

 

경상도진주연화산옥천사유공록(慶尙道晋州蓮華山玉泉寺有功錄)

 

연화산은 진양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층층이 산들이 우뚝 솟아 마치 여러 송이의 연꽃잎이 궁수별자리 옆에 솟아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이다. 그 가운데 있는 옥돌에서 쏟아져 나와 한 길로 졸졸 흘러내리며 바위계곡 굽이굽이 금옥소리를 내는 것이 옥천이니, 대개 인도로부터 흘러 중국으로 가는 것처럼 동쪽으로 흐른다. 유명한 숲과 훌륭한 골짜기 곳곳에 있으면서 붉고 푸른색 교대로 비추며 꽹과리와 징 소리 서로 이어 들리면 산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그 이름을 부여한 뜻이 아마도 사찰 앞의 샘이 유명하여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일 것이다. 아니면 이미 사찰이 있고 난 후에 그 사찰을 치장하려고 이름 붙인 것인가. 이것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일찍이 두보가 지은 옥천이라는 시에 보면 “연꽃이 교대로 공명조를 향한다[蓮花交嚮共鳴鳥]”는 구절이 있는데 어쩌면 거기에서 따온 말이 아닐까. 또 감히 알지 못하지만, “이 산의 형상 수승하네[玆山形勝]”라는 구절이 두보가 지은 시에 있지 않을까. 대체로 우리나라 동남의 산수는 중국 오월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니, 산음의 회계와 악양의 여러 산 역시 그 지역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이름 붙였다. 이곳의 연화와 옥천이 어찌 두보가 말한 바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산과 사찰의 이름이 생긴 이유이다. 내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 이루어지고 훼손되는 인연은 사찰 역시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거주하는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말하였다. “임계년(1632-1633) 이전에 대해서는 승려들도 증거할 바가 없습니다. 경진년 숭덕 4년(1640) 이후는 대략 기록이 있으니, 학명과 의오가 그해에 처음 창건하였고 갑신년(1644)에 동상실을 지었습니다. 을유년(1645)에 심검당을 짓고, 갑오년(1654)에 선당과 법당을 조성하였습니다. 성익이 실제로 경영하기 시작하여 경자년(1660)에 승안이 그 공을 완성하였습니다. 갑진년(1664)에 정문을 세웠는데 돈계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이것이 실로 사찰 모양이 점차적으로 성취된 인연이지만 불력이 아직 견고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진중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남북 군영에 간여하게 되어 밧줄과 종이 만드는 일이 끝도 없고 가산산성의 승역에 징발되는 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하나의 발우도 없고 뜬구름도 머무르기 어려워 새도 물고기도 흩어져 사찰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갑오년(1654)부터 병진년(1676)까지 거의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산승 묘욱은 선(禪)의 국량이 있었는데, 중흥할 것을 깊이 다짐하고 직접 먼저 입정하였으며 승려들을 모으고 대중을 장려하여 여우와 토끼의 굴을 수리하고 땔나무하고 농사지을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에 점루각과 향적전이 세워졌으며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월당을 지었습니다. 큰 종을 설치하고 대상(大像)을 달았으며 옛 기와를 바꾸고 옛 땅을 넓혔습니다. 청련암과 백련암이 앞뒤로 세워지고, 청계당과 옥련당이 차례로 조성되었습니다. 비록 권선하는 사람은 달랐지만 단월 각각의 힘은 실로 묘욱이 그들의 벼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승려들이 묘욱의 공을 칭찬함이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승려의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가의 일에 대해서라면 유자가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 흥폐의 원인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바가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부처를 존경하는 정성에 대해서라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재물을 모아 사찰의 면모를 이렇게 이루었으니 일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여 바로 이곳에서 경배하며 부처님을 대대로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대단한 사업을 함에 있어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는 것 역시 그 사이에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사찰 방에 들어가서 사찰의 옛 일을 묻고 흥하고 폐했던 진실을 낱낱이 서술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어찌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옥천은 나의 백석암이고, 묘욱은 또 나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보충설명하자면, 내가 일찍이 여기서 천연두를 앓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묘욱이 구제해주었으니 실로 승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합니다.” 그 발우를 전수받은 시매 역시 묘욱의 교화를 받은 자이다.

30여 년 동안 겨우 사찰을 유지하였다. 그 후 (1776년) 시축 스님이 이전 현인들이 도모했던 것을 계승하여 의수, 취경, 보구, 석규, 탄주, 치관 등 5,6명의 선사들과 함께 정성들여, 여러 전각과 요사체는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세우며 빈 터를 채워나가고 작은 것을 쌓아 큰 것을 이루어 쓰이는 바가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시축 스님은 옥천사를 중흥하는 주장이었고, 의수, 취경, 보구, 석규, 탄주, 치관 등 5,6명의 스님들은 지키고 완성하는 데 있어서 좋은 짝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축공의 도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축 스님의 공은 지금까지 전례가 드문 것이었으니, 이에 사적에서 분명하지 않은 시축 스님의 공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이 시축 스님의 공을 본받도록 하고 만세천추에 무궁토록 전하고자 한다.

건륭 56년 신해년(1791) 6월에 찬영이 쓰다.

 

한 치의 공도 버리지 않고 기록하되 같은 이름이 중첩되어 실리지 않도록 하였다.

 

시(時) 승통(僧統) 보각등계(普覺登階) 석거징(釋巨澄)

가선(嘉善) 우징(宇澄)

통정(通政) 응청(應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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