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 옥천사 창건 기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종무소 작성일26-09-28 16:02 조회13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蓮華山 玉泉寺 創建記文 - 1706(肅宗 32, 康熙 45)
연화산옥천사창건기문(蓮華山玉泉寺創建記文)
연화산은 진양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층층이 산들이 우뚝 솟아 마치 여러 송이의 연꽃잎이 궁수별자리 옆에 솟아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연화라고 한다. 그 가운데 있는 옥돌에서 샘이 솟아 나와 한 길로 졸졸 흘러내리며 바위계곡 굽이굽이 금옥소리를 내는 것이 옥천이니, 대개 인도로부터 흘러 중국으로 가는 것처럼 동쪽으로 흐른다. 유명한 숲과 훌륭한 골짜기 곳곳에 있으면서 붉고 푸른색 교대로 비추며 꽹과리와 징 소리 서로 이어 들리면 산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그 이름을 부여한 뜻이 아마도 사찰 앞의 샘이 유명하여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일 것이다. 아니면 이미 사찰이 있고 난 후에 그 사찰을 치장하려고 이름 붙인 것인가. 이것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일찍이 두보가 지은 옥천이라는 시에 보면 “연꽃이 교대로 공명조를 향한다[蓮花交嚮共命鳥]”는 구절이 있는데 어쩌면 거기에서 따온 말이 아닐까. 또 감히 알지 못하지만, “이 산의 형상 수승하네[玆山形勝]”라는 구절이 두보가 지은 시에 있지 않을까. 대체로 우리나라 동남의 산수는 중국 양월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니, 산음의 회계와 악양의 여러 산 역시 그 지역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이름 붙였다. 이곳의 연화와 옥천이 어찌 두보가 말한 바와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산과 사찰의 이름이 생긴 이유이다. 내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 이루어지고 훼손되는 인연은 사찰 역시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거주하는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말하였다. “임계년(1632-1633) 이전에 대해서는 승려들도 고증할 바가 없습니다. 경진년(1640) 이후는 대략 기록이 있으니, 학명과 의오가 그해에 처음 창건하였고 갑신년(1644)에 동상실을 지었습니다. 을유년(1645)에 심검당을 짓고, 갑오년(1654)에 현당과 법당을 조성하였습니다. 성익이 실제로 경영하기 시작하여 경자년(1660)에 승안이 그 공을 완성하였습니다.
갑진년(1664)에 정문을 세웠는데 돈계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이것이 실로 사찰 모양이 점차적으로 성취된 인연이지만 불력이 아직 견고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진중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남북 군영에 개입하게 되어 밧줄과 종이 구하는 일이 끝도 없고, 가산산성의 승역에 징발되는 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하나의 발우도 없고 뜬구름도 머무르기 어려워 새도 물고기도 흩어져 사찰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갑오년(1654)부터 병진년(1676)까지 거의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산승 묘욱은 선(禪)의 국량이 있었는데, 중흥할 것을 깊이 다짐하고 직접 먼저 입정하였으며 승려들을 모으고 대중을 장려하여 여우와 토끼의 굴을 수리하고 땔나무하고 농사지을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에 점루각과 향적전이 세워졌으며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월당을 지었습니다. 큰 종을 설치하고 대상(大像)을 달았으며 옛 기와를 바꾸고 옛 땅을 넓혔습니다. 청련암과 백련암이 앞뒤로 세워지고, 청계당과 옥련당이 차례로 조성되었습니다. 비록 권선하는 사람은 달랐지만 단월 각각의 힘은 실로 묘욱이 그들의 벼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승려들이 묘욱의 공을 칭찬함이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승려의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가의 일에 대해서라면 유자가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 흥폐의 원인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바가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처를 존경하는 정성에 대해서라면 말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재물을 모아 사찰의 면모를 이렇게 이루었으니, 일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여 바로 이곳에서 경배하며 부처님을 대대로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대단한 사업을 하는데 흥하기도 하고 폐하기도 한 것 역시 그 사이에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사찰 방에 들어가서 사찰의 옛 일을 묻고 흥하고 폐했던 진실을 낱낱이 서술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어찌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옥천은 나의 백석암입니다. 묘욱은 또 나의 은사이기도 합니다. 보충설명하자면, 내가 일찍이 여기서 천연두를 앓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묘욱이 구제해주었으니 실로 승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 합니다.”
그 발우를 전수받은 시매 역시 묘욱의 교화를 받은 자이다. 그가 내게 사찰과 선가의 발자취를 기록해줄 것으로 요청하였다. 내 비록 유학자로서 기록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사적을 기록하는 것은 묘욱의 공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묘욱의 문하 승려들이 내 글로 인해 묘욱의 공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기록한 모든 것이 유가의 책무로서 사양할 명분이 없는 것이리라.
이 사찰을 처음 창건한 해는 경진년 숭덕 4년(1640)이고, 또 67년 후 병술년(1706)에 지촌 정몽상이 기록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