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사 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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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명 작성일70-01-01 09:00 조회4,67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고성 옥천사 대종(固城 玉泉寺 大鐘)**은
조선 후기인 **1776년(영조 52)**에 만들어진 청동 범종입니다. 당시의 주종장 **이만중(李萬重)**과 **백예적(白詣適)**이 제작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항목
내용
명칭
고성 옥천사 대종
한자
固城 玉泉寺 大鐘
별칭
옥천사 동종·옥천사 범종·옥천사 반종
시대
조선 후기
제작
1776년(영조 52)
주종장
이만중(李萬重), 백예적(白詣適)
지정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소재
경남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
2. 형태의 특징
이 종은 우리나라 전통 범종처럼 거꾸로 세운 항아리 모양의 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한국 범종에서 볼 수 있는 **음통(音筒)**이 없습니다. 대신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두 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성군 설명에 따르면 음통이 없는 점 등에서 중국 종의 양식적 특징을 보입니다.
따라서 옥천사 대종은 단순히 조선 후기 범종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범종과 중국 종 양식이 만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범종을 왜 울렸을까?
범종의 소리는 불교적으로 단순한 신호음이 아닙니다.
종소리를 듣는 순간이라도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종소리가 널리 퍼져 지옥 중생과 땅속의 생명들에게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옥천사에서도 전통적으로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 종을 울리는 의미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4. 「대종 기문」과 함께 보면 더욱 중요합니다
옥천사에는 이 대종과 관련된 「대종 기문」이 전합니다. 『고성 연화산 옥천사 사적기』의 목차에도 「대종 기문」이 불화론 부분에 별도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옥천사 대종을 연구하거나 전시할 때는 단순히
“1776년에 만들어진 범종”
으로 설명하기보다,
① 제작 연대 → ② 주종장 → ③ 종의 양식 → ④ 대종 기문 → ⑤ 옥천사의 불교 의례
를 연결해서 설명하면 훨씬 의미가 깊습니다.
고성 옥천사 대종
1776년(영조 52)에 주종장 이만중과 백예적이 만든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거꾸로 세운 항아리 모양의 몸체와 두 마리 용으로 장식한 용뉴가 특징이다. 일반적인 한국 범종과 달리 음통이 없는 점에서 중국 종의 양식적 요소도 확인된다. 종소리는 번뇌에서 벗어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기를 기원하는 불교적 의미를 지닌다. 옥천사의 의례와 역사를 함께 보여주는 중요한 불교문화유산이다.
1776년 옥천사 대종은 단순히 두 명의 장인이 만든 종이라기보다, 사찰의 불사 운영 능력과 지역 신앙공동체, 그리고 서로 다른 지역의 전문 주종장이 결합한 대형 불사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1. 먼저 명문이 알려주는 사실
종신의 주종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乾隆四十一年 丙申八月日
慶尙右道 晋州南面 蓮華山 玉泉寺 大鍾改鑄記 …
舊鍾本重六百斤 新鑄添金一百斤
都片手 李萬重 白詣適
즉 건륭 41년(1776) 8월, 진주 남면 연화산 옥천사에서 대종을 다시 주조했고, 기존 종의 무게가 600근이었으며 새로 100근의 금속을 더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도편수(都片手) 이만중과 백예적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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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려 — 불사를 조직하고 후원한 주체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1776년 종의 전체 시주 승려 명단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특정 승려를 시주자라고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옥천사는 18세기 후반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고, 여러 대형 불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경제적·인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옥천사는 조선 후기 **부찰(富刹)**로 알려졌으며, 사찰답과 산림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776년 대종 주조는 개인의 발원보다는 사찰 차원의 의례·재정 운영과 연결된 불사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改鑄(개주)’**입니다.
처음부터 새 종을 만든 것이 아니라,
舊鍾本重六百斤 — 옛 종은 본래 600근이고
新鑄添金一百斤 — 새로 주조하면서 100근을 더했다
고 했습니다.
즉 옥천사에는 이미 대형 종이 있었고, 그것을 다시 주조할 필요가 생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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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주자 — ‘100근을 더한 불사’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 종을 만들면서 100근의 금속을 추가했다는 것은 상당한 규모의 물자 조달이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다만 현재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자료만으로는 그 100근을 누가 얼마씩 시주했는지까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100근의 금속을 추가하여 옛 종을 개주하였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며,
“누구누구가 얼마를 시주했다”
라고 구체화하려면 「옥천사 대종 개주기」 원문 전체 또는 관련 사찰 문서의 대조가 필요합니다.
이 점은 앞서 살펴본 고려시대 옥천사 청동북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청동북에는 여러 관료·여성·비구니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776년 대종의 현재 확인 가능한 주종기 자료에서는 핵심적으로 개주 사실과 장인의 이름이 부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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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만중(李萬重) — 경상도 계열의 수장 장인
이만중은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주종장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최근 연구 정리에 따르면 이만중은 경상도 이씨 일파의 주종장으로, 1767년부터 1788년까지 약 21년 동안 모두 6점의 동종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활동은 경상도 지역과 밀접합니다.
옥천사 대종에서는 명문에
都片手 李萬重
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만중은 단순 보조공이 아니라 도편수, 즉 제작을 이끄는 수장급 장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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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예적(白詣適) — 전라도 계열의 또 다른 수장 장인
백예적도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이만중 = 주종장
백예적 = 보조 장인
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 해석을 수정합니다.
백예적 역시 독립적으로 활동한 수장급 주종장으로 파악됩니다. 그는 이만중보다 7년 빠른 1760년 목포 달성사 동종을 시작으로 1776년 옥천사 반종까지 약 16년 동안 5점의 동종과 1점의 금고를 제작했습니다.
활동 지역도 차이가 있습니다.
* 이만중 → 경상도 중심
* 백예적 → 전라도 중심
그런데 1776년 옥천사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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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왜 두 명의 수장 장인이 함께 만들었을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종의 크기입니다.
옥천사 대종은
* 높이 119.1cm
* 입지름 82.4cm
로 18세기 후반 동종 가운데 상당히 큰 편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50~70cm급 종과 달리 제작 난도가 높았고, 두 명의 전문 주종장이 공동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연구자는 1788년 무주 안국사 동종에서도 이만중과 다른 수장급 장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사례를 들어, 당시 대형 종 제작에서 복수의 수장 장인이 협업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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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두 장인의 ‘손길’은 종의 형태에서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종의 장식에서 두 장인의 양식적 특징이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만중 계열의 특징
* 범자 표현
* 얕은 당초문
* 사다리꼴 연곽
* 합장한 보살상
* 종구의 연화당초문
등은 이만중이 이후 제작한 **법주사 동종(1785)**과 **안국사 동종(1788)**에서도 확인됩니다.
백예적 계열의 특징
반면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은 백예적이 제작한
* 달성사 동종(1760)
* 안심사 동종(1760)
* 백운암 동종(1767)
등에서 보이는 특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옥천사 대종은 한 사람의 양식만 보여주는 작품이라기보다 경상도 이만중 계열과 전라도 백예적 계열의 기술과 양식이 만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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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옥천사 대종의 역사적 의미
이 대종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지역을 넘은 장인 네트워크’**입니다.
옥천사는 경상도에 있었지만, 제작에는 경상도 계열의 이만중뿐 아니라 전라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예적이 참여했습니다. 두 장인이 각자의 독자적인 제작 활동을 하면서도 1776년 옥천사라는 한 현장에서 공동으로 대형 종을 완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옥천사 대종은 단순한 사찰 종이 아니라,
옥천사의 경제력과 불사 역량 + 신도들의 후원 + 전문 주종장 네트워크 + 18세기 후반 불교공예의 기술
이 결합된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舊鍾 600斤 + 新鑄添金 100斤’**이라는 기록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1776년의 불사가 단순한 신규 제작이 아니라 기존 대형 종을 해체·재주조하면서 금속을 추가한 대규모 개주불사였음을 직접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압축하면
1776년 옥천사 대종은 옛 종 600근에 새 금속 100근을 더하여 다시 주조한 대형 불사였다. 주종기에는 도편수 이만중과 백예적의 이름이 남아 있다. 두 사람은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적인 수장급 주종장이었으며, 옥천사 대종에서는 이들의 기술과 양식이 함께 나타난다. 이 종은 18세기 후반 옥천사의 사찰 운영과 불사, 그리고 지역을 넘어 활동한 전문 장인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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