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 옥천사
숭조선 후기에 옥천사는 부찰(富刹)이었다. 사찰답 800여 두락을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5:5의 비율로 도지(수)를 받으면 1,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산판은 560 정보로 산지기가 5-6명이나 되었다.
사찰답이 많은 이유는 농민들이 산판을 논으로 개간한 후 3년간 자영한 후 사찰답으로 귀속 받은 것이 많지만, 스님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도지 받은 추곡으로 계속 논을 불려나갔기 때문이다.
절이 부찰이었던 만큼 신중의 승려수는 300명~ 100명에 이르렀다. 현재도 법당이 9개나 되고 각종 유물이 400점 이상 남아 있으며, 각종 현판이나 기문이 92점이나 남아 있다. 기문이 이렇게 많이 남아 조선후기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사례는 드문 일이다.
1950년 10월 28일 단행된 농지개혁 때 800 두락의 사찰답은 소작인들의 손에 전부 넘어갔다. 하루 아침에 한 평 없는 빈찰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임야는 아직도 건재하다. 고성군 개천면, 영오면, 영현면, 대가면 등 4개면에 565ha의 임야가 사찰림으로 등기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이룩된 주요 불사를 보면, 효종 5년(1654)에 대웅전을 건립했고, 숙종27년(1721)에 대종(大鐘)을, 영조 40 (1764)에 자방루를, 영조50년(1774)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순조4년(1808)에 괘불을, 고종원(1864)에 대웅전을 각각 조성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승려들을 국방에 이용할 목적으로 바닷가 사찰에 승군을 양성했는데,
① 영조 19년(1743) 옥천사의 승군 정원은 340명이었고(金堂重修上梁文 : 乾隆 8年 癸亥 軍丁 合340名),
② 영조 31년(1755년)에는 300명(玉泉寺之堂上樑文 東片將 通政雷逸 150名, 西片將 判事智英 軍丁150名),
③ 헌종8년(1842)에는 170명(東邊將 幸守, 西邊將 輔敬 軍丁 合 170名),
④ 고종4년(1867)까지도 137명의 군정(軍丁)이 있었다고 한다. ( 金堂移建上梁文, 東片將 必權 軍丁數 72, 西片將 萬一 軍丁數 65)
이와 같은 사실은 여러 전각을 수리하다 발견된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승군은 일명 항마군(降魔軍)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몽고군이 쳐들어 왔을 때부터 승군이 동원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 한양전투, 금산전투를 비롯한 곳곳의 전투에서 맹활약을 벌였다. 이러한 호국승군의 공로가 인정되어 승려에게도 벼슬이 가자되고 대우가 달라졌다.
조정에서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을 치른 경험을 살려 병자호란 이후부터 바닷가 사찰을 위주로 승군을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사찰을 속칭 군막사찰(軍幕寺刹)이라 불렀다.
현재 옥천사의 넓은 마당은 승군의 훈련장이었으며 자방루(慈芳樓)는 편장(片將)이 앉아 승군을 지휘하거나 비가 올 때 승군을 교육시키던 장소였다. 승군은 2개 편대로 나누어 동편장(東片將)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당상관), 서편장은 판사(判事)가 맡았다. 이들은 모두 벼슬을 제수 받은 승려로서 주지의 산하에 있었으나 군사작전에 관한한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옥천사는 정조 말기(1800경)에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 : 관에서 쓰는 닥종이로 임금이 열람하였므로 어람지)로 지정되어 철종 14년(1863)까지 60여 년 동안 닥종이 제조부역에 시달렸다.
심한 노역에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자, 헌종 8년(1842)에는 상주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 여명으로 줄여주고 닥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지만 그 것 조차 감당하지 못해 고종 17년(1880)에는 불과 십여 명의 승려만 남았다한다.
철종 14년(1863) 당시 통제영의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있던 신관호(申觀浩)공이 옥천사를 방문하여 “연화옥천(蓮華玉泉)” 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이 때 농성 화상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면제시켜줄 것을 호소, 신공이 조정에 장계(狀啓)하여 닥종이 부역을 면제 받게 되었다.
옥천사는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벗어나자 이로부터 대중이 늘고 사세를 회복하게 되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구한말까지 상주 승려 100명~200명에 12승방과 12물방앗간이 있었다한다.
옥천사는 조선 후기에 오랫동안 진주목 관할에 있었던 까닭에 "진주의 대찰 옥천사" 라 일컬어졌다.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사주하여 불사를 일으킨 일이 많았고 진주목과 경상우도 감영, 삼도수군통제영, 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같은 관의 도움이 화근이 되어 철종13년(1862), 진주의 농민들이 탐관오리들의 세공미 수탈에 반발하여 진주민란(우우통의 난)을 일으켰을 때 성난 농민들이 옥천사로 몰려와 절 외곽의 전각을 불태우고 대종을 파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고종25년(1888)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학군이 몰려와 절 외곽에 있는 많은 전각들을 불태웠다. 당시 다급해진 용운대사가 '이 절에는 주상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다.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너희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니라!' 하고 호통을 치자, 역적이란 말에 놀란 농민들이 방화를 중단함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웅전, 자방루, 적묵당, 탐진당 등 사찰 중심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한다.
이렇게 옥천사가 번번이 민란에 수난을 당한 까닭은 이 절이 관의 도움을 받는 부찰(富刹)이었기에 관아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 하고 만만한 옥천사를 공격함으로서 관에 대한 강한 항의 표시를 한데 원인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전각들이 대개 1890년대에 건립된 것은 동학란에 불탄 후 다시 중건했기 때문이다.
고종 27년(1890) 조정으로부터 "명산고찰에서는 왕실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 는 교지가 내려오자 당시 경상도관찰사 겸 진주목사로 있던 상국(相國) 박규희가 사재를 털어 축성전(祝聖殿)을 짓고 임금의 수복안녕을 기원했다. 이 때 고종으로부터 축성전(祝聖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현재 절에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