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 옥천사
1911년 일제가 <사찰령>을 공포하고 31본산을 정할 때 옥천사도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와 더불어 대본산으로 지정 되었지만 당시 주지 채서응(蔡瑞應)스님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석, 대본산 지정을 극구 사양함으로서 지정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옥천사 승려들은 대본산 지정이 안 된 것을 잘 된 일이라고 하며 칭찬이 자자했다한다. 그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과 같이 60년 동안 닥종이 부역에 혼이 난 옥천사 승려들이 관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거부반응을 보였던데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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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는 조선 후기에 부찰(富刹)이었던 만큼 1920년 경 진주 옥봉에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포교당을 창건, 광복 전에는 "통도사포교당” , 광복 후에는
"연화사(蓮華寺)"라 불렀다. 그것은 옥천사의 배산이 연화산이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에는 개천면 예성리와 명성리 중간에 옥천중학교를 건립하였으나 인가를 받지 못해 무산 되었고 잇달아 옥천사 경내, 지금의 청담스님 사리탑이 있는 자리에 옥천중학교를 설립하여 일시 중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옥천사는 지금 쌍계사의 수석 말사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통도사의 수석 말사였다. 그러나 옥천사 주지는 항상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선출하여 본사의 승인을 득하는 형식을 취했으므로 통도사에서 주지를 뽑아 파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옥천사의 위상과 인물은 대단하였다.
1921년 세진교(洗塵橋 , 무지개다리) 비문을 쓴 대 강백 박한영 스님은 “오호! 교남(嶠南 : 경상도)에 그 옛날 웅장했던 崇福寺(경주),黃龍寺(경주), 嚴川寺(함양), 斷俗寺(산청단성)와 같은 대찰들이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외로운 찰주와 부서진 탑만이 무심한 뜬구름과 서산 낙조에 그림자 지고 있는 이 마당에 오직 옥천사만이 인간세상의 세월을 벗어난 듯 법등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에 석덕스님들과 주민들이 시주하여 公衆을 위하여 다리를 가설하였다하니 실로 천 년을 이어오는 유풍이 아닐 수 없으며 비석에 새겨 송덕해도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7세기에 창건된 옥천사가 1,300년이 지나도록 법등을 이어오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