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산 옥천사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현상유지만 하다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사의 승려들이 의승군을 조직, 왜군에 대항하였다. 왜군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정유재란 (1597)시절 건물을 모조리 불태웠다.
절터는 40여 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채 폐허로 내려오다가 인조 17년(1640) 학명대사(學明)가 이 근방을 지나다가 인근 대둔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웅장한 가람터로 인도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사가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보니 과연 꿈속에서 보았던 대 가람 터인지라, 도반인 의오대사(義悟)와 함께 수년 동안 참선하면서 동상당(東上堂) 초가집을 짓고 연화산 옥천사라 제액(題額)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 묘욱(妙旭)대사, 사축대사, 용운(龍雲)대사, 농성대사, 수룡(水龍) 대사, 같은 고승들이 대대로 이 절에 주석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사세를 확장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절터는 40여 년 동안 잡초만 무성한 채 폐허로 내려오다가 인조 17년(1640) 학명대사(學明)가 이 근방을 지나다가 인근 대둔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웅장한 가람터로 인도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사가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보니 과연 꿈속에서 보았던 대 가람 터인지라, 도반인 의오대사(義悟)와 함께 수년 동안 참선하면서 동상당(東上堂) 초가집을 짓고 연화산 옥천사라 제액(題額)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에 묘욱(妙旭)대사, 사축대사, 용운(龍雲)대사, 농성대사, 수룡(水龍) 대사, 같은 고승들이 대대로 이 절에 주석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사세를 확장시켜 오늘에 이르렀다.